Re-defining Family

Rev. Nam Ok Yoo

(Mark 3:20-35)

I once read a post by a minister on a Facebook group for UCC ministers. He posted a photo of his church, where there was a large sign that said: “If the church makes you uncomfortable, then it is doing its job.”  The post drew much attention from many United Church ministers, and I remember one person left an approving comment with a thumb up and a comment saying: “The Gospel is there to afflict the comfortable, and comfort the afflicted.” Certainly the church is countercultural.

 

연합교회 목회자들의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어느 목회자의 게시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목회자는 본인이 사목하는 교회 사진 하나를 게시했는데, 사진 속 교회 앞에는 큰 간판이 세워져 있고, 그 간판에는 “교회가 당신을 불편하게 만든다면 교회는 그 구실을 하고 있는 겁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이 게시물은 많은 연합교회 목회자들로부터 주목을 끌었는데, 저는 어느 분이 “엄지척” 이모티콘과 함께 남긴 댓글을 기억합니다. “복음은 안락한 자들에게 도전장을 내밀고, 괴로움을 당하는 사람에게는 위로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확실히 교회는 반문화적인 것인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In our denomination, we want to be humble and avoid prosperity theology. But in some churches, people are not interested in Jesus’ suffering, death and the cross, but are interested in wealth, power and status. It is like two different children who are waiting for their dad after work. When their father comes home, one child is delighted because she sees her dad’s presence. On the other hand, another child is delighted because she sees a gift in her dad’s hand. Now let us think that those children are us as Christians who are looking for God. Seeing God and experiencing God is not the second child’s ultimate goal as Christian, but getting something out of God is the child’s goal. Both children are delighted upon seeing God but they are quite different in their motives and attitudes.

 

연합교단에 속한 우리는 겸손하고자 하고, 번영신학의 논리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그러나 일부 교회에는 예수님의 고통, 죽음, 십자가에는 관심이 없고 부, 권력, 지위와 같은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퇴근 후의 아빠를 기다리는 두 아이와 같습니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 오면 한 아이는 아버지의 존재를 알아 보고 기뻐합니다. 반면에 다른 아이는 아빠의 손에 든 선물을 보고 기뻐합니다. 그 아이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둔 우리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둘째 아이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는 것이 목표입니다. 두 자녀 모두 하나님을 보고 기뻐하지만 그 둘의 동기와 태도는 상당히 다릅니다.

 

There are people who come to church to be comfortable, to be as they have been, not wanting to be changed or transformed. And if it shakes them, they feel irritated and uncomfortable, and withdraw. This is not new - even 2000 years ago, people had similar reactions.  When Jesus urged people to open their eyes to see the new heaven and new earth, proclaiming the Kingdom of God, people were irritated by having their beliefs challenged. And those people were the elites in high positions of power in their religion.

 

살면서 아무런 변화를 원하지 않고 맘 편안하게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교회에 오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떤 이유로 흔들리게 되면 그들은 짜증을 내고 불편함을 느끼게 되며 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이미 이천 년 전에도 사람들은 우리와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새하늘과 새땅을 보기 위해 눈을 뜨라고 하시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들 자신의 믿음이 도전받음으로 인해 짜증이 났고 예수로부터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대개가 다 엘리트 계층으로 그들의 종교기관인 유대교 회당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입니다.

 

Among them, there are scribes whose job is to interpret the scripture. They witnessed miracles, such as when Jesus healed the sick, cast out demons, proclaimed the kingdom of God, comforted the marginalized and outcast by eating with them, and broke the Sabbath when he cured a man’s withered hand. They had never seen such power and authority, but sadly they labelled him as “out of his mind”. They insisted that Jesus was like Beelzebul, as demonic and Satanic. The scribes were challenged by Jesus’ ability, and from their confusion, they chose to reject what they saw and to be irritated by Jesus’s new teachings that shook the foundations of their religious law.

 

그 사람들 중에는 성경을 해석하는 일을 하는 서기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하시던 기적을 보았습니다.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사회의 낙오자들과 어울리며 그들을 위로하셨고, 그들과 함께 먹으셨고, 안식일에 일하지 않는다는 율법을 깨고 손이 마른 사람을 고쳐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러한 능력과 권위를 여태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을 “제 정신이 아닌”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바알세불을 가지고 있으며 악의 영, 사단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인 “새로운 창조”에 대해 무지합니다.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도전을 받았고, 예수님의 이 모든 가르침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혼란스러웠으며, 그들이 보고 들은 것들을 거부하면서, 그들 자신의 종교적 율법을 흔들어버리는 예수님이 설파하시는 그의 새로운 가르침에 무척 예민해 있었습니다.

 

Sadly, the same could also be said for Jesus’ family.  In the Gospel of Matthew, Jesus was not accepted by his brothers and townspeople. The people who brought up together with Jesus in his hometown gossiped behind his back, saying, “He is crazy. He has an unclean spirit.” Despite the strength of family ties in ancient Israel, this incident could have nearly broken the tightness of the family bond. They try to bring him back home, but Jesus’ response shocks everyone when he asks: “Who are my mother and my brothers?” And he provides his own answer, saying “whoever does the will of God is my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안타깝게도 예수의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그의 형제들과 그가 같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마을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습니다. 고향에서 예수님과 함께 자란 사람들은 등 뒤에서 “저 예수라는 자는 필시 미친 게 분명해. 악의 영을 가지고 있다네.” 고대 이스라엘의 가족적인 유대가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예수님 가족의 유대를 거의 깨뜨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가족은 그를 집으로 데려 오려고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내 어머니와 형제는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며 모든 사람에게 충격에 빠뜨립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자매이자 어머니”라며 그 자신이 그 물음에 답합니다.

 

What does this Bible text tell us?  When we think about family, our vision is confined to our immediate biological family. But Jesus tells us to overcome this narrow-minded thinking. The boundaries that make up a family should extend to all on earth because they are all God’s beloved children. No one can exist outside of this boundary, the family of God, since everyone’s life matters to God. The family Jesus sees transcends simple biological, blood relationships.

 

이 성서 구절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가족에 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생물학적 가족에만 국한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런 좁은 생각을 극복하라고 하십니다. 바로 가족의 영역이 지상의 모든 사람에게까지 확장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이들의 삶이 하나님께는 중요하기 때문에 누구도 하나님의 가족의 테두리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족의 개념은 생물학적이고 혈통적인 관계를 초월합니다.

 

I came across a story written by a theologian. He grew up in the Deep South in Arkansas on the Mississippi River Delta in 1950s and 1960s, and wrestled with his own prejudices during the civil rights movement. As white Southerner, he was taught white supremacist and racist viewpoints by family members and school since childhood. He describes his experience like so:

 

저는 우연히 어느 한 신학자가 쓴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1950 년대와 1960 년대 미시시피 강 삼각주에 있는 아칸소의 딥 사우스에서 자랐으며, 시민권 운동이 벌어진 사이에 자신의 편견과 씨름했습니다. 남부 백인으로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학교로부터 백인우월주의와 인종차별적 관점을 배웠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They taught it to me, not because they were evil - quite contrary, they were wonderful people in my life – but because they were captive to racism and had come to accept that racism was the way to find and maintain life. As I came to hear other voices from God’s Spirit – voices that told me that racism was not God’s will – I began to be in internal conflict with my family and my community. it was a struggle and continues to be a struggle at some points.” He draws parallels to Jesus’s shocking proclamation that his family, as close as they may be, can be a part of the problem that threatens God’s kin-dom.

 

“내 가족은 그들이 나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 오히려 정반대로 그들은 내 인생에서 훌륭한 사람들이었습니다 – 그들이 인종차별적 편견에 사로 잡혀 있고 그 인종차별주의가 그들의 삶을 유지하는 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인종차별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성령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면서부터 내 가족과 내가 속한 사회와의 내적 갈등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힘든 고난의 투쟁이었으며 지금도 가끔은 지속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는 왜 예수님이 자신의 가족도 모두가 속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견지에서 보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하셨는지를 이해하게 됐다고 합니다.

 

If there is one thing we know, it is that churches today must learn from Jesus and live out discipleship. We must learn from Jesus to weep with those who weep, and to rejoice with those who rejoice, and ensure suffering with an open mind and heart. This is a demanding task that requires a strong will to enter into a new solidarity with God’s whole family. The concept of family is now re-defined, not by blood, but by commitment, to do God’s will and God’s mission. There is hope. In the midst of our shame and our painful acknowledgments of our failings in our roles in Indigenous Residential Schools, we see hope in opportunities for justice. We will talk about this more on June 20, Indigenous Day of Prayer.

 

우리가 알고 있는 확실한 한 가지는 예수님에게서 배우고 제자도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린 가슴과 마음으로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울고, 기뻐하고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을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만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가족과 더불어 새로운 연대를 다지며 예수님을 따르려는 의지가 요구되는 힘든 작업입니다. 가족의 개념은 이제 혈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선교를 행하겠다는 우리의 약속으로 재정의되었습니다. 우리에게 희망은 있습니다. 원주민 기숙학교 프로젝트를 통해 우리가 범한 실패에 대한 우리의 고통스러운 인정과 수치심 속에서우리는 정의의 기회인 희망을 봅니다. 이에 관해서는 6 월 20 일, 원주민을 위한 기도의 날에 더 이야기 하도록 하겠습니다.

 

Thanks be to God who brings us the wisdom to widen our horizon to see things as Jesus would see. May your kin-dom be here and now.

 

예수께서 보신 것처럼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여기 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