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estling with Nicodemus

Rev. Nam Ok Yoo

(John 3:1-17)

Today is Trinity Sunday. Unlike many other words, the word, “Trinity”, is not found in the Bible. In other words, it is a concept that was developed and formed in Christian tradition as one of the Christian doctrines. And it is considered as one of the most difficult concepts to understand because it is so mysterious. How can we best underst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Creator God, Jesus the Word made flesh, and the Spirit who dwells in us and others? What is the logic of the character of God as three in one and one in three? How can we deepen our understanding of the doctrine to enrich all the relationships in our lives? A theologian once said that if we can prove the existence of anything, it would not be God but some sort of idol, and St. Augustine once said, “If you can grasp it, it is not God.” Why is that? Because God is unknowable, unseeable, and indefinable.

 

오늘은 삼위일체주일입니다. 다른 많은 낱말들과는 달리 “삼위일체”라는 말은 성경에는 씌어 있지 않습니다. 이 낱말은 기독교 교리의 하나로서 기독교 전통에서 발전되고 형성된 개념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매우 신비스러운 개념이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사뭇 어렵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그리고 우리와 타인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3자 관계를 어떻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을까요? 하나의 위격에 거하는 삼위, 그리고 삼위에 거하는 하나의 위격이라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특성의 논리는 무엇입니까? 우리 삶의 모든 관계를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 어떻게 이 교리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깊게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신학자는 우리가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일종의 우상일 것이라고 말했고,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당신이 그것을 파악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그것은 하나님은 알 수 없고, 볼 수 없으며, 정의내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So, rather than trying to prove the character of God as Trinity, I will be discussing something else this morning. The doctrine of the Trinity makes no sense if we understand it only as abstract dogma. Rather, it should meaningfully relate to our everyday lives so that we can ponder upon how our own church community and our relationship with others can be transformed.

 

그래서 저는 오늘 삼위일체 하나님의 특성을 증명하기보다는 다른 것에 대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추상적인 교리로만 이해한다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의 교회 공동체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우리의 일상 생활과 의미있게 관련되어야 합니다.

 

In today’s Gospel reading, we met an interesting figure, Nicodemus. He is a Pharisee and a ruler of the Judeans. He is a man from Jerusalem and a member of the urban elite. One day he travels to see Jesus at night likely due to fear from being caught by his fellow Judean Pharisees. He shows his respect by calling him honorifically, “Rabbi”, which means “Teacher”, which is unusual - it was uncommon for a member of the Jerusalem elite to address Jesus, a Galilean village man, in such a respectful manner. He says to Jesus, “I have seen your signs, your miracles, and I know that you are from God. I know who you are.”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서를 읽으면서 흥미로운 인물인 니고데모를 만났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자 유대인의 통치자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출신이며 도시 엘리트의 일원입니다. 어느 날 그는 동료 유대 바리새인들에게 붙잡힐 것이 두려운 나머지 밤에 예수를 만나러 갑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선생님”을 의미하는 “랍비”라고 부르며 존경을 표하는데, 이것은 특이한 일입니다. 예루살렘 출신 엘리트가 갈릴리 시골 마을 사람인 예수님을 그렇게 존경하는 태도로 호칭하는 일은 당시에는 드문 일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이 일으킨 기적, 표적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하나님에게서 왔음을 압니다. 나는 당신이 누군지 압니다.”

 

Then Jesus challenges Nicodemus by telling him that no one can see God’s realm “without being born again, born anew, born from above”. While Nicodemus wants to talk about physicality and material world, Jesus is speaking about spiritual matters, like being born again, and born of the Spirit. While Nicodemus wants to hear about a story of cosmic mystery like miracles, instead, all he hears from Jesus is an unexpected invitation to be reborn of the Spirit and water, and he becomes confused and puzzled. And that’s when Nicodemus’ curiosity turns into a struggle. And the only thing that Nicodemus can say is, “how can this be?” and “How can anyone be born after having grown old?” “How can this be?” Nicodemus’ ponder becomes our question. What does it mean to be born again?

 

그러자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도전장을 내미시는데요, 예수님은 “새롭게 거듭나지 않고는, 영으로 거듭나지 않고는”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니고데모는 육체라든지 물질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 원하지만, 예수님은 거듭난다거나 영으로 나는 것과 같은 영적인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하십니다. 니고데모는 기적과 같은 우주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지만, 예수님에게서 들은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는 생각지 못한 초대일 뿐이라 혼란스럽고 당황스럽습니다. 그때 니고데모의 예수님에 대한 호기심이 힘겨운 내적 씨름으로 바뀌게 됩니다. 니고데모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은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니까?”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니고데모의 사고와 숙고는 곧 우리의 질문이 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The Greek word ‘anothen’ has a double meaning, both ‘anew’ and ‘from above.’ In the context of the story, Jesus challenges Nicodemus to move beyond what he knows about how God works in us and among us and for us and to consider the mystery of spiritual rebirth. Jesus confuses Nicodemus by suggesting that to see God’s realm we must be born again and be born from above, by the work of the Spirit. We are to be born of the Spirit which blows like the wind, blows where it chooses, blows so even though we hear the sound of it, we do not know where it comes from or where it goes. It means that the works of the Spirit is not something that we can control or predict. All of this must have confused Nicodemus who knew all about what and how to keep the Moses’ law and moral teachings and instructions of the synagogue, except for this new teaching, being born of the Spirit. Nicodemus is puzzled and asks, “How can these things be?”

 

그리스어 'anothen'은 '새롭게'과 '위에서'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의 맥락에서 볼 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들 사이에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에 대해 그가 생각하는 바를 훨씬 뛰어 넘을 것과, 영적으로 거듭남의 신비를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으려면 성령의 일하심를 통해 위로부터 거듭나야 한다고 하며 니고데모를 혼동케 하십니다. 우리는 비록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임의로 부는 바람과도 같이 영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일하심이 우리로 하여금 통제가 가능하거나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한 가지, 즉 거듭난다는 새로운 가르침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 즉 모세의 율법이라든지 유대교 회당의 도덕적 가르침과 교훈을 지키는 방법 등에 대해 알고 있던 니고데모를 혼란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당황하며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Experiencing God, experiencing Spiritual rebirth also means a pivotal change in your life. Transformation of your life to see God right here and now, which changes your worldview, your attitude, your life goal, and all in your life. And I believe that is what God likes us to be. I think that is the way to live as followers of Jesus, the light, the way, and the truth in this world.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 영적으로 거듭나는 일을 경험하는 것은 삶이 송두리째 변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바로 이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삶의 변화는 여러분의 세계관, 태도, 삶의 목표, 그리고 삶의 모든 것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원하시는 삶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빛이요 길이요 진리인 예수님의 제자들로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Did Nicodemus like it? I don’t think so. Why would he? Nicodemus had everything - he had power and status as a member of Sanhedrin, the highest structure of the Jewish religion. What on earth then he would want changes in his life?

 

니고데모가 그런 삶의 변화를 좋아했겠습니까? 그렇지 않겠지요. 니고데모가 왜 자기의 인생에 변화를 주고 싶어했겠습니까? 니고데모는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고대 이스라엘의 가장 높은 조직인 의회 겸 법원, 산헤드린의 일원으로서 높은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왜 본인의 인생에 변화를 원했겠습니까?

 

I have an interesting story for you. There was once a minister. One day he baptized a two-year-old child. As usual, the minister read the standard pronouncement from the prayer book: “You are a child of God, sealed by the Spirit in your baptism, and you belong to Jesus Christ forever.” At this moment, unexpectedly, the child responded, “Uh-oh.” And the minister thought it was an appropriate response . . . a stunning and shocking theological affirmation affirming the seriousness of faith.  Like this two-year-old child, Nicodemus’ response to Jesus would be heard as a shocked “Uh-oh.”  In today’s text, we see Nicodemus alarmingly finds Jesus moving toward him to rescue him, transform him, and to save him.

 

여러분에게 해 드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가 계셨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는 두 살 난 아이에게 세례를 주게 되었습니다. 평소와 같이 그분은 세례 선언문을 읽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이 세례식에서 성령으로 봉인된 하나님의 자녀이며,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노라.”라고 목사가 말씀하는 순간, 갑자기 두 살 난 어린아이가 “어머나!”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목사는 그 어린이의 대응이 적절한 것이었다고 하는데요, 우리의 믿음에 진지하게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놀랍고 충격적인 신학적 확언이라는 것입니다. 이 두 살짜리 아이처럼 예수님에 대한 니고데모의 반응도 놀람과 충격이 뒤섞인 “어머나, 세상에!”가 아니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니고데모는 놀랍게도 예수님이 자신을 구하고 변화시키고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And I wonder about what he thought on his way back home at dawn after the conversation with Jesus ended. He wasn’t a member of Jesus’ band. Nicodemus remains as one of the few side characters of Jesus, and he might have been a secret Jesus’ follower. He is an interesting character who appears two more times in John’s Gospel. We hear of him again when he stands up for Jesus in Chapter 7. He proclaims his faith in Jesus, telling his colleagues that they should not judge Jesus before giving him a trial. Then he makes a third appearance in Chapter 19 after Jesus’ crucifixion when Nicodemus accompanies Joseph of Arimathea to gather, anoint, and bury the body of Jesus.

 

저는 예수님과의 대화가 끝난 후 새벽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궁금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그저 예수의 주변인물 중 한 사람인데, 그를 비밀리에 따르는 인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 두 번 더 등장하는 흥미로운 인물인데요, 그는 7 장에서 다시 나타나 예수님을 대변합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을 선포하면서 바리새인 동료들에게 예수님을 재판하기 전에 예수님을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 후 그는 19 장에서 예수님 사후 다시 등장해서 아리마대의 요셉과 함께 예수의 시신을 가져다 몰약과 침향 등 향품을 발라 장사를 지냅니다.

 

What I see from his appearances in John’s Gospel is that his faith has been growing over the years. At first, he brings questions but soon becomes confused. He then later defends Jesus, and he finally shows his respect to gather the body of Jesus upon his death. Faith, at least in Nicodemus’ case, takes time. When we talk about faith, there exist differences: everyone has their own type and level of faith. For some, faith can be easy, quick and strong with rare occasions of doubt.  But for many more others, faith comes more in fits and starts, two steps forward and another back. Or perhaps at times things seem clear and at others confusing. Or maybe it is like an endless string of questions rather than straight answers. We ponder upon all sorts of questions that we encounter in our lives, and we question, “How can these things be?” like Nicodemus. In that sense, we are Nicodemus. We wrestle with things odd and incomprehensible happening in this world. We wrestle like Nicodemus. But the good news is that we can grow in faith like Nicodemus did. We come before God and gladly abide in God in Jesus, but occasionally we might fail and lose hope. But God is patient with us and waits for us no matter how long it takes until our eyes are opened so we see things we didn’t see before; our ears can hear things that we didn’t hear before, and we feel the whispering sound of God in us. God never gives up on us. God waits for us with patience until our hearts are widely opened and we are transformed. And that is all the work of the Spirit.

 

요한복음에 이곳 저곳에 나타난 니고데모의 모습에서 저는 그의 믿음이 성장해 왔음을 봅니다. 그는 처음에는 질문을 가지고 왔지만 이내 혼란에 빠집니다. 그러다 그는 예수님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게 되고, 마침내 예수 사후에는 예수님의 시체를 거두는 것으로 예수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냅니다. 적어도 니고데모의 경우를 볼 때, 믿음은 시간이 걸리는 문제입니다. 우리들의 믿음에는 다름이 존재합니다. 모든 사람은 각기 다른 믿음의 유형과 수준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믿음은 의심의 여지도 없고, 쉽고 빠르며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은 두 발짝 앞으로 나아가고 나서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것 같은 둘쭉날쭉한 경우가 더 많습니다. 또는 가끔 상황이 명확해 보이기도 하다가 이내 혼란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혹은 우리의 믿음은 확실한  대답이라기보다 끝없는 질문의 연속과 같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질문에 대해 숙고하고 니고데모처럼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니고데모입니다. 우리는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이해하느라 씨름합니다.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씨름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은 니고데모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믿음 안에서 성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오고,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거하지만 가끔은 실패하기도 하고 희망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라도 우리가 변화될 때까지 우리를 참으시며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게 될 때까지, 우리가 전에 듣지 못했던 것을 들을 수 있을 때까지, 우리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속삭이는 소리를 느낄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넓게 열리고 변화될 때까지 인내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성령의 일하심의 결과입니다.

 

The Spirit is indeed like a wind. We, as an individual, and as Willingdon Heights United Church, we need to open ourselves up to the Spirit, be still, and say yes to God’s invitation. The Spirit will bring us peace and joy, patience, and goodness, which embolden us to carry out God’s will and God’s mission for the world which God loves so much. Thanks be to God, the Spirit, the source of wisdom. Amen.

 

성령은 바람과 같습니다. 개인으로, 그리고 윌링던하이츠연합교회로 우리가 할 일은 이 바람과 같은 성령께 우리 자신을 온전히 열고, 고요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하며, 하나님의 초청에 응하는 일입니다. 그런다면 성령은 우리에게 평안과 기쁨, 인내와 선함을 가져다 줄 것이며,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사명을 수행하도록 우리에게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지혜의 근원이신 성령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