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Hope and Abundance

Rev. Nam Ok Yoo

(Mark 4:26-34)

Yesterday and the day before yesterday, Russell and I participated in Pacific Mountain Region’s annual gathering. Around 300 people joined and it was wonderful to see many people in our region in this online gathering. We are indeed indebted to video conferencing technology that allows us to connect during the pandemic.  This year’s theme is “with hope and abundance,” and I felt strange talking about abundance in the midst of pain, struggle, and even anger.

 

지난 주말, 러셀과 저는 우리 Pacific Mountain Region의 2021년 연차 총회에 참석을 했습니다. 약 300명 가까운 사람들이 참석을 했는데, 이 온라인 회의에서 우리 퍼시픽-마운틴 리전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 참 좋았습니다. 우리는 화상회의를 가능케 하는 테크놀로지에 정말 많은 빚을 지고 삽니다. 올해의 주제는 희망과 풍요인데요, 요즈음 시기적으로 저는 고통과 분투, 그리고 분노로 인해 상심해 있던 터라 풍요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And I would like to ask you:  How have you been? How do you feel these days? For me, I have never been this unfocused, disappointed, sad, and angry by the recent news. Three weeks ago, we all heard about the discovery of the remains of 215 children buried at the Kamloops Residential School site. Then last week, we heard about a family of 3 generations killed by a white truck driver who intentionally targeted them because they were Muslim. The news instantly appeared in Korean newspapers, and someone made a comment in the article: “Did it really happen in Canada? How disappointing! I always thought Canada is different from America.”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요즘 기분이 어떠신지요? 저는 요즈음의 뉴스로 인해 이토록 집중이 안 되고, 실망스럽고, 슬프고, 화가 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3 주 전에 우리는 캠룹스 원주민 기숙학교 부지에 묻힌 215 명의 아이들의 유해에 대해 처음으로 뉴스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에는3 대에 걸친 가족이 그들이 이슬람 신자라는 이유로 어느 백인 트럭 운전사가 운전하는 트럭에  치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뉴스는 즉시 한국 신문에도 실렸는데, 그 기사에 누군가 이런 코멘트를 달아 놓았습니다. “이 일이 정말 캐나다에서 일어났나요? 정말 실망스럽네요! 캐나다는 미국하고 다른 줄 알았는데...”

 

I am going to begin my reflection with an editorial from the Globe and Mail, which goes like this: “Close your eyes and imagine you are at home with your two children, a boy aged six and a girl aged eight. There’s a knock on the door. It’s a moment you’ve dreaded for weeks. You answer it and there is a man from the government and an RCMP officer who order you to turn your children over to them immediately. The children are led away and placed in the back of a truck in which you can see other children crying. Your boy and girl are screaming that they don’t want to leave you but, the minute you show any resistance, the policeman steps in to enforce the law. You are compelled to give up your children, because the state has judged you to be unfit as a parent on account of your race. That night, you are alone with your spouse in an empty house, broken-hearted, powerless and without hope, everything that matters stolen by the state.” (June 2, 2015)

 

저는 오늘 Globe and Mail 신문 2015 년 6 월 2 일자에 나온 사설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 사설은 다음과 같습니다. “눈을 감고 여러분이 여섯 살 난 아들과 여덟 살 난 딸와 함께 집에 있다고 상상하십시오. 지금 누군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납니다. 여러분이 몇 주 동안이나 두려워했던 순간입니다. 여러분은 그 문을 열어 줍니다. 공무원과 경찰이 두 자녀를 즉시 넘기라고 합니다. 울고 있는 다른 아이들을 태운 트럭 뒷좌석으로 여러분의 딸과 아들은 끌려갑니다. 여러분의 아들 딸은 집에서 떠나고 싶지 않아 비명을 지르지만 어떤 저항이라도 보일 시에는 경찰이 개입하기 때문에 그건 포기해야 합니다. 이 나라가 여러분의 인종을 빌미 삼아 여러분이 부모로서 부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녀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날 밤, 여러분은 아이들이 없는 텅 빈 집에서, 속상하고 무력하며 아무런 희망이 없이 국가로부터 여러분의 모든 중요한 것을 뺏긴 경험을 하게 됩니다.”

 

You may already know what this is about. I can only imagine the families’ fear when their children were forcefully taken to the residential schools. I can only try to imagine how they would feel for their children taken to the system operated by the government and the church. A professor once said, “The Residential School system is a national sin,” and I wonder how it will ever be forgiven. Can it be? It may never be. How can we, as a faith community, commit ourselves to live out the Gospel of love, justice and hope? How can we do that?

 

여러분은 이미 이 사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아실 것입니다. 저는 단지 아이들이 강제로 기숙학교에 끌려 갔을 때 가족들이 느낀 두려움을 상상으로 밖에 알 수가 없습니다. 정부와 교회가 운영하는 제도에 끌려간 아이들이 어떻게 느꼈을 지에 대해서도 저는 상상으로 밖에 알 길이 없습니다. 한 교수는 “기숙학교 제도는 국가적인 죄다”라고 말했는데 저는 어떻게 그것이 용서될 수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용서가 될까요?  결코 안 되는 일일 지도 모릅니다. 과연 우리는 한 신앙공동체로서 어떻게 사랑과 정의와 희망의 복음을 실천하기 위해 헌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그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As I read through the 94 recommendations of the 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 I want to highlight recommendation number 45. It says: “We call upon the Government of Canada, on behalf of all Canadians, to jointly develop with Aboriginal peoples a Royal Proclamation of Reconciliation to be issued by the Crown. The proclamation would build on the Royal Proclamation of 1763 and the Treaty of Niagara of 1764, and reaffirm the nation to nation relationship between Aboriginal peoples and the Crown.”

 

진실과화해위원회의 94 개 권고 사항을 읽으면서 저는 특히 다음과 같은 45 번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모든 캐나다인을 대신하여 캐나다 정부에 원주민과 함께 왕립화해선언문을 만들 것을 요청합니다. 이 선언은 1763 년의 왕립선언과 1764년 나이아가라 조약을 기반으로 하며 원주민과 왕실 간의 국가 대 국가로서의 관계를 재확인하려는 것입니다.”

 

More than 250 years have passed since the Treaty of Niagara, and we admit it has never been a fair, equal, or just agreement between two parties. We will never be able to undo or remove it from history, so our only alternative is to learn from history, so that we never make the same mistake ever again. In this sense, I think all Canadians - Indigenous peoples, European descendants and immigrants from other parts of the world - need to reaffirm “the nation-to-nation relationship” agreement between 24 Indigenous Nations and the Crown, because I believe our relationships with other cultures should be equal, respectful, and just. In order to bring reconciliation and healing, we need truth, which unfortunately has been hidden and concealed. Something must be done.

 

그 이후로 250 년 이상이 지났지만, 그것이 한번도 양자 사이에 있어 공정하거나 평등하거나 정당한 합의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역사를 취소하거나 제거할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역사에서 배워서 다시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모든 캐나다인 - 원주민, 유럽에서 온 후손, 그리고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온 이민자들 - 이 24개의 원주민 국가와 왕실 사이의 "국가 대 국가 관계"합의를 재확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문화와의 관계는 평등하고 존중하며 공정하게 대해야 합니다. 화해와 치유를 위해서는 먼저 진실이 드러나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이 진실은 가려져 있었고 숨겨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합니다.  

 

In today’s gospel reading, Jesus used the parable of the mustard seed to talk about the kin-dom of God. Jesus said the greatest tree on earth starts from an invisible beginning. The greatest tree starts from something so small that looks next-to-nothing. What Jesus is telling in this story is, the beginning of the kin-dom of God is not from something unusual or extraordinary; rather it starts with the lives of ordinary people, who are not famous or rich, not very important just like you and me. The kin-dom of God begins from people just like us.

 

오늘 아침 우리는 마가복음의 본문을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를 사용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가장 큰 나무는 역설적이게도 매우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특이하거나 비범한 것에서 출발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오히려 유명하지도 않고 부자도 아닌, 여러분이나 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서부터 비범함이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And there is one condition in this parable. The reign of God begins with the lives of ordinary human beings who provide shelter for others in their shade and who care for others. That means in our ordinary lives, every time when we stretch our branches to provide shelter for others, the kin-dom of God can be experienced and expanded. God loves those who are not perfect or great, who are just like the tiny mustard seed, invisible and insignificant. Our being faithful begins with this being imperfect, and invisible. But God changes us, transforms us, the invisible and the insignificant, to help our neighbours to experience the kin-dom of God in our ordinary lives.

 

그런데, 이 비유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다른 사람들에게 쉴 곳을 제공하고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함께 시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평범한 삶을 살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쉴 만한 장소를 제공하기 위해 우리의 가지를 펼쳐 줄 때마다 하나님 나라가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지도 않고, 크지도 않으며, 작은 겨자씨와 같이 보이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신실함은 불완전하고 보잘 것 없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잘 것 없고 중요하지 않은 우리를 변화시키셔서,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의 평범한 삶에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도록 돕습니다.

 

Sowing seeds is inherently an activity done out of hope. In a situation of starvation, farmers carefully keep seeds and sow them in the hope that they yield crops or bear fruit. Likewise, we, as a congregation, sow seeds of hope: seeds of intercultural ministry; seeds of children’s ministry; seeds of outreach ministry for the neighbouring community; seeds of truth and reconciliation with indigenous peoples; seeds of radical hospitality to the LGBTQ people.

 

씨를 뿌리는 행위는 원래 희망으로부터 말미암은 활동입니다. 굶주린 상황에서 농부들은 농작물이나 과실을 수확하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씨앗을 보관하고 그것을 뿌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교회로서 희망의 씨앗을 뿌립니다. 문화상호목회의 씨앗, 어린이목회의 씨앗, 아웃리치 사역의 씨앗, 원주민과의 화해와 진리의 씨앗, LGBTQ 커뮤니티 사람들에 대한 혁신적인 환대의 씨앗도 뿌립니다.

 

People might say a mustard tree is not a great tree like a cedar tree. This is true. But Jesus says our seed is not that of the great cedar tree but of mustard; it will not become a mighty tree but a shrub where birds, animals, insects and people find rest under its branches. We sow seeds of hope so that one day we will live in respect of others regardless of who they are. May we all continue to live hopefully and faithfully so that our faith community becomes a useful place to learn God’s way and practise God’s hope and compassion for all people. Let us now listen carefully to what Indigenous peoples have to say. In listening, there is new hope. In action, there is a bright future. With every action, God’s seed will grow and grow. Only then, can we talk of hope and abundance.

 

사람들은 겨자 나무가 삼나무같은 아름드리 나무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뿌리는 씨는 삼나무 씨가 아니라 겨자씨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삼나무 같은 아름드리 거대한 나무가 아니라 관목이며, 새나 동물, 곤충이나 사람들이 그 가지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도록 만들어 주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타인을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희망의 씨앗을 뿌립니다. 우리 신앙공동체가 하나님의 길을 배우고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소망과 연민을 실천할 수 있는 유용한 장소가 되도록 우리 모두가 계속해서 희망과 신실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제 원주민들이 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어야 합니다. 들음으로 인해 새로운 희망이 생깁니다. 우리의 행동에는 밝은 미래가 따릅니다. 우리가 이루어 가는 일 가운데 하나님이 뿌리시는 씨가 자라고, 또 자라날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희망과 풍요에 대해 이야기 해 볼 수가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Thanks be to God for the vision of the mustard seed. May God bless us and our ministry! Amen.

 

겨자씨의 비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 우리와 우리가 하는 목회 위에 축복을 내리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