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mation Sunday 

Renewed and Renewing

Rev. Nam Ok Yoo

(Text: Matthew 22:34-46)

Today’s text, Matthew 22, tells us that Jesus is a faithful Jew. When asked by one of the Pharisees what is the greatest commandment in the Hebrew Bible, he answers: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and with all your soul, and with all your mind.” This is Judaism’s most fundamental ancient biblical passage written in Deuteronomy 6:5.

 

오늘 성경 본문인 마태복음 22장은 예수님이 신실한 유대인이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바리새인 중 한 사람이 히브리 성경의 율법에 있는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는 신명기 6장 5절에 쓰여진 유대교의 가장 근본이 되는 고대 성경 구절입니다.

 

But Jesus doesn’t want to stop there. He adds something more: “You shall love your neighbour as yourself,” which comes from Leviticus 19:18. And these two passages are the essence of Jesus’ mission and ministry. For Jesus, these two are the most important rules among the 613 rules in the Hebrew Bible. Jesus states that the whole Jewish scripture - which you might call the Old Testament, including the law and the prophets - drive from these two fundamental rules. 

하지만 예수님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구절을 더 덧붙이는데, 이는 레위기 19장 18절에서 나온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구절입니다. 이 두 구절은 예수님의 선교와 사역에 있어서 핵심 구절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에게 이 두 가지 규칙은 히브리 성경에 기록된 613 개의 전체 규칙 중 가장 중요한 규칙이고, 율법과 선지서를 포함한, 여러분이 흔히 구약 성경이라고 부르는, 유대 경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규칙이라고 예수님은 말합니다.

He means that loving God with all your heart, all your soul, and all your mind is what we must do but it requires loving your neighbour. In other words, if the first commandment is the highest goal in faith, you are given an action plan for that: and it is to love your neighbour as yourself.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은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조건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첫 번째 계명이 신앙에서 가장 높은 목표라면 그것에 대한 실천 계획을 갖게 되는데, 바로 이 실천 덕목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Because whether your neighbour is similar to you or not, they are all God’s children. If you say you love your God, then you should love what God loves. What does God love? John 3:16 provides the answer: “For God so loved the world that he gave his only Son,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him may not perish but may have eternal life.” God loves the world, not just you and me.  Not just Protestant Christians, or Catholic Christians, or just white people, or even just human beings, but the whole world of creation. And, of course, this is also the central point of the Genesis story of creation. Then how can you love God without loving what God created and loves? 

왜냐하면 여러분의 이웃이 여러분과 비슷하든 아니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사랑하십니까? 요한복음 3장 16절이 정답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당신과 나 뿐만 아니라, 개신교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가톨릭 기독교인, 백인, 인류 뿐 아니라, 창조 세계 전체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물론 이것은 또한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의  중심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사랑하신 것을 사랑하지 않고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To sum up, God’s love is not confined to certain individuals, communities, or even just the human species. God’s creation is far wider than we can begin to imagine. That is why Jesus challenges us to love even our enemies and to forgive them over and over again! In other words, forgiving someone is a good way to love. 

 

요약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느 특정한 개인이나 공동체, 심지어 인류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을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고 우리를 도전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사랑의 좋은 방법인 것입니다. 

 

You cannot exclude God’s creatures or oppress them when it comes to loving God. To love God is to love what God loves, and Jesus knows it through his deeper understanding and knowledge on the Jewish Scripture.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의 피조물을 배제하거나 압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며, 예수님은 히브리 성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식을 통해 그것을 알고 계십니다.

 

His interpretation of the Scripture is so fundamentally different from those of the scribes and the Pharisees, and he courageously confronts them. So, Jesus becomes a profound threat to them. Who are these people? The scribes and Pharisees are the leaders in the Jewish community, but they have power, prestige, and authority, and also misunderstand and misuse the law. They put heavy burdens on others. They are exclusivists, and hypocrites, and want attention by others. They would have perhaps thought that they were faithfully keeping the traditions and doctrines in their strict Orthodox manner. But for Jesus, just knowing and keeping the law is not the point. For him, living out the faith matters the most. 

 

예수님의 히브리 성경 해석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며 예수님은 그들에게 용감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고 맙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던 사람들로, 유대인 공동체에서 권력과 특권, 권위를 가지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오용한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무거운 짐을 지웁니다. 그들은 배타주의자들이고 위선자들이며,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를 원합니다. 그들은 아마 엄격한 정통 방식으로 전통과 교리를 충실히 지키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율법을 알고 지키는 것이 요점은 아닙니다. 예수님에게는 믿음을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Jesus’ confrontation against them causes ongoing debates, threats, and violence. Although Jesus is a faithful Jew, he tries to break the bonds of their religious custom. And likewise, we, Christians, should thoughtfully consider our religious traditions, customs, and doctrines, and always be on the lookout whether they are being used as a tool for power, prestige, and exclusion.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저항은 지속적인 논쟁과 위협, 그리고 폭력을 일으킵니다. 예수님은 충실한 유대인이지만 종교적인 풍습의 유대를 끊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니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신앙을 권력과 특권, 배제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종교적인 전통이나 관습, 그리고 교리가 있는지 세심히 살펴 보아야 합니다.

 

Let us go back to our history for a while. Exactly 503 years ago, on October 31 in 1527, a 34-year-old German monk called Martin Luther nailed a document, listing 95 propositions to the door of the Wittenberg Cathedral. By doing so, he attacked the prevailing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 that had the power through the sacraments, to ensure a person’s salvation. But what Luther realized was that salvation is not through the sacrament but through a free gift from God which is the core theology of the Apostle Paul. Luther insisted that we don’t earn God’s grace by our work or things we do. Rather, it is given by God. Luther’s conviction gained wide support and initiated the Protestant Reformation. 

 

그러면 잠시 그리스도교의 역사로 돌아가 봅시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3년 전인 152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라는 34세의 독일 승려가 비텐 베르크 대성당 문에 95 개의 제안을 나열한 문서를 못 박았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각 개인의 구원을 확실하게 보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당시 만연하던 영성체를 통한 그리스도 교회의 가르침을 공격했습니다. 그렇지만 루터는 구원은 영성체를 통해서가 아니라 사도 바울의 핵심 신학인 하나님의 거저 주신 선물을 통해서라는 것입니다. 루터는 우리의 일이나 하는 것들로 하나님의 은혜를 벌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루터의 신념은 광범위한 지지를 얻었고 개신교 개혁을 시작하게 했습니다.

 

Luther means a lot for us today to renew our faith. Luther warned the Church not to use faith as a tool for power, prestige, and exclusion. The reformers, Zwingli and Calvin in Switzerland, John Knox in Scotland, Thomas Cranmer in England, were courageous and passionate to challenge the society to reform, renew, and reshape the Church of the times. 

 

루터는 오늘날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는 데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루터는 교회가 권력과 권세, 그리고 타인을 배제하기 위한 도구로 신앙을 사용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개혁가인 스위스의 쯔빙글리와 캘빈, 스코틀랜드의 존 녹스, 영국의 토마스 크랜머 는 시대의 교회를 개혁하고 새롭게 하며 재구성하기 위해 사회에 도전하는 데 용기 있고 열정적이었습니다.

 

But at the same time, we must remember that it accompanied the sacrifice of numerous lives through hatred, violence, and war. Excommunications, denunciations, and divisions in the church happened afterwards.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그것은 증오와 폭력, 그리고 전쟁을 통해 수많은 생명의 희생을 동반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비난과 파문, 그리고 교회의 분열이 추후 일어났습니다.

 

And more importantly, Luther unwittingly inspired some of the great evils of the modern world. According to an article of the UCC magazine, the Broadview, formerly the Observer, the communist leaders of East Germany used his image as a hero of revolutionary thinking. And the Nazis quoted one particular Luther’s writing to stoke public support for the persecution of Jews.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루터가 자신도 모르게 현대 세계의 큰 폐해 중 일부에 영감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옵저버라고 불렸던 UCC 잡지 브로드뷰의 한 기사에 따르면, 동독의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그의 이미지를 혁명적 사고의 영웅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치는 유대인 박해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루터의 글을 인용했습니다.

The magazine article says Luther was a very important man, but he was no hero. Some say Luther gave millions of people hope that we can never forget. People may disagree on this, and I can understand - but I still firmly believe, no matter your opinion on Luther, that we must vigilantly check what we have done wrong and how our faith may be unwittingly used for evil ends. 

 

그 잡지 기사에 따르면 루터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지만 영웅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루터가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다는 희망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 루터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에 관계 없이 - 우리는 우리가 잘못한 일과 우리의 믿음이 악의적 목적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용되는 방법을 경계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It means we ought to live in reforming, renewing, and reshaping our understanding about Scripture and our faith. It means we are called to read the society in Jesus’ perspective, live in the truth, and act upon it. It means we must look back, mend, and reconcile for healing for a better future for our descendants. 

 

그것은 우리가 성경과 우리의 믿음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개혁하고 새롭게 하며, 재구성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관점에서 사회를 읽고, 진리 안에서 살며, 그것에 따라 행동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후손들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되돌아 보고, 고치고, 치유를 위해 화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Hope was shown in the Second Ecumenical Council of the Vatican in the Catholic Church, which was all about reconciliation. The church allowed for Catholics to pray with other Christian denominations, encouraged friendship with other non-Christian faiths, and opened the door during Mass for languages other than Latin. Hope for healing and reconciliation was rekindled. Likewise, we must constantly work towards a welcome and ongoing dialogue between the church and the First Nations peoples, among Christian denominations, among religious communities, and between oppressors and oppressed among peoples and nations. 

 

희망은 화해에 관한 것으로 채워진 가톨릭 교회의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나타났습니다. 교회는 가톨릭 신자들이 다른 기독교 교단과 함께 기도할 수 있도록 허용했고, 다른 비기독교 신앙과의 우정을 장려했으며, 미사 중에 라틴어 이외의 언어사용에도 문을 열었습니다. 치유와 화해에 대한 희망이 다시 불붙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교회와 원주민, 기독교 교단, 종교 공동체, 억압자와 억압받는 민족과 국가 간의 대화를 환영하고 지속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What else?     

What else are we willing to do? 

How will we be able to learn to love our neighbour? 

Where will we need courage?    

또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또 기꺼이 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 사랑하기를 어떻게 배울 수 있습니까?

우리에게 용기가 필요한 곳은 어디입니까?

© 2020 Willingdon Heights United Church. Proudly created with Wix.com

  • Facebook App Icon
  • Twitter App Icon
  • Google+ App Ic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