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sus Prays for His Disciples and for Us

Rev. Nam Ok Yoo 

Summer is coming, and the season reminds me of sunglasses. Although people wear them all year round, we normally wear them in summer to protect our eyes.

 

여름이 가까워지는 계절이라 그런지 선글라스가 생각납니다. 요즘에는 사람들이 사철 가리지 않고 쓰 지만, 따가운 햇살로부터 눈을 보호하기 위한 보호용으로서 선글라스는 여름이 제철이지요.

 

And I assume everyone you own at least one pair of sunglasses. Have you noticed there are different kinds of sunglasses, with different coloured lenses? There are sunglasses with green lenses, blue, brown and all other colours in between. If you wear green coloured lens sunglasses, you will see the world through a hue of green lenses which will affect how you see and feel about the world.

 

모두들 한개 정도는 선글라스를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선글라스의 렌즈 색깔이 다양하다는 것을 알고 계신지요? 녹색, 푸른색, 밤색, 혹은 그 중간색 등 참 다양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녹색의 렌 즈가 들어간 선글라스를 쓰시면 그 렌즈의 색깔을 통하여 세상을 보고 느낄 것입니다.

 

It is like how we think about God and the world.

 

그건 마치 우리가 하나님과 이 세상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과 같습니다.

 

We see people and the world through a specific coloured lens. In the same way, we see God and the world with our own unique perspective.

 

우리는 어느 특정한 색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봅니다, 같은 식으로 우리는 우리만의 독특한 시각 으로 하나님과 세상을 봅니다.

 

We all have different views of God, based on our experience, knowledge, culture, tradition, and even individual characteristics, and we call it theology. You could even say that we all have our own unique theology. And because it is up to our own individual circumstances and our own rich experience of the world, we cannot say one’s own theology is right and others’ are not. We all have different approaches to our own theology, as if we all have our own unique sunglasses through which we see and interpret God and the world.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지식, 문화, 전통, 그리고 심지어는 개인의 성격에 따라 하나님에 대해 견해를 달리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독특한 신학을 가지고 있다 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이 신학은 우리의 개인적 상황과 저마다의 풍요로운 세상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누구의 신학은 옳고 다른 이들의 신학은 그르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마치 저마다 다른 독특한 선글라스를 갖고 있듯, 우리 모두는 다른 신학적 접근방법을 가지고 하나님 과 세상을 보고 해석합니다.

In today’s Scripture reading, we get a sense of the unique perspective of the writer of the Gospel of John - and in a sense, his type of “sunglasses”. The writer of the Gospel must have spent a lot of time speculating the identity of Jesus to have his own unique view on him. He starts his gospel with this: “In the beginning was the Word, and the Word was with God, and the Word was God. He was in the beginning with God.”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을 통해 우리는 요한복음서를 쓴 저자의 독특한 시각 - “선글라스”- 것을 알 수 있 습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그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 그 정체성에 대해 사 색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 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Unlike other Synoptic Gospels, such as Matthew, Luke or Mark, the Gospel of John shows a unique view of Jesus. Here, Jesus becomes the proxy to God. The line between these two becomes blurred and it feels as if they have become one. And they have a loving relationship and Jesus prays for the disciples and us to have the same intimate relationship with God and with one another.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등 다른 세 공관복음서들과는 다르게 요한복음은 예수님에 대한 고유 한 시각을 드러냅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매우 근접해집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두 위격 사이 의 선이 불분명해지면서 거의 하나가 됩니다. 그 두 위격은 매우 친밀한 관계로 나타나는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들이 그와 같은 친밀한 관계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맺을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What kind of relationship would that be? It can be explained by paying attention to the words used in the Gospel.

이 관계란 도대체 어떤 관계를 말하는 것일까요? 이는 요한복음에서 사용된 몇몇의 낱말을 통해서 설명되어 질 수 있겠습니다.

As you may have heard this morning, some frequently used words in this Gospel are “to know” and “to believe”.

우리가 성경 봉독 시간에도 들었다시피, “알다”와 “믿다” 두 낱말이 요한복음에서 많이 쓰이고 있습니 다.

We need to pay attention to these words since they cannot be simply translated. Rather, we should look into the cultural implications that they might have when they are translated into another language. For example, the word “to know” is used in Genesis 4:1. It says, “Adam knew Eve and she conceived Cain.” The Hebrew word, yada, used here, and it can be translated into “to know” in English. But the deeper meaning it carries beneath the surface-level meaning is “to enter into a personal, intimate, and trustful relationship with each other,” where the relationship has equal and mutual involvement.

 

이 낱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이 낱말들이 단순하게 번역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다 른 언어로 번역할 때 그 낱말들이 품고 있는 문화적 함축의미가 소실되지 않도록 포함시켜야 합니다. 그 말은 그 낱말의 원래 고유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살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창세기 4 장 1절에 보면 “알다”라는 낱말이 쓰입니다. 그 구절을 보면, “Adam knew Eve and she conceived Cain.”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를 know라는 낱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직역하면 “아 담이 이브를 알았고, 이브는 카인을 임신했다.”로 번역됩니다.) 여기에 쓰인 히브리어인 ‘야다(yada)’ 는 영어로 단순히 “알다”라고 번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이 주의를 기울이게 되면 겉표면적 인 ‘알다’로서의 의미를 넘어 “서로 사적이고 친밀하며 신뢰를 주는 관계로 들어가다”라는 의미가 있 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관계는 주-객의 종속관계가 아니고, 서로가 동등한 자격으로 서로에게 관여하는, 두 주체간의 주체적인 관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낱말은 한 주체가 동등하고 존중받는 태도로 다른 주체와의 사적이고 신뢰가 있는 관계 속으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In the Gospel of John, the word “to know”, is used as the same vein as the word “to believe.” In the same way that knowing someone is to enter a deeply personal and trusting relationship with another, it also suggests that this same kind of relationship exists in our faith. When we say we believe in God, we mean that we give our entire hearts to God. And because our human hearts are considered to be our essence, and it requires our whole being, including our body, mind, and emotions. That means that we cannot believe in God simply with our heads and intellect. When the Gospel of John speaks of knowing and believing God, it uses these words interchangeably.

 

요한복음에서 이 “알다”라는 낱말은 “믿다”라는 낱말과 같은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믿다”라는 말은 우리의 믿음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종류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은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은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 한 정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음을 바친다고 ,할 때 우리의 육체와 정신, 그리고 감정까지도 모 두 다 내어 드려야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다시 말해, 단순히 우리의 머리와 이성만으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두 낱말, “알다”와 “믿다”는 모두 사적이고 친밀함을 가리킵니다.

 

In today’s Scripture reading, Jesus prays to God that God would protect the disciples. He prays for his disciples and for us to be nurtured and grown in faith, and for us to not stumble over evil things; from worldly things such as power, wealth and prestige; to any form of hatred, such as jealousy and pride; discrimination based on race, culture, age, gender, or religion. And in this way, we may be one with God and become one with one another. And this is to make the disciples and ourselves become united as one.

 

오늘의 성경말씀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제자들을 보호해 주실 것을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우리들의 신앙이 성숙되고 신앙의 자양분을 얻을 수 있기를, 그래서 세상적인 것들 즉, 권력와 부, 그 리고 권세로부터 어떤 형태의 증오 즉 질투와 자만심, 인종이나 문화, 나이, 성역할, 그리고 종교 등을 기반으로 한 차별 등 악으로부터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기도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혹 은 우리들 사이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제자들과 우리들은 하나로 연합될 수 있습니다.

 

The purpose of this Gospel was to nurture the people in John’s community. The Johannian community needed their faith to be nurtured. The Parousia, Jesus’ Second Coming, which they hoped for, had been delayed for nearly two generations; they were in danger of being expelled from their place of worship; they were in such immediate danger of persecution such that it made it nearly unbearable to be living faithfully within Christ. This Gospel was written to assure them Jesus’ faithfulness and give them hope, through his farewell discourse, praying for their protection and growth in faith.

 

요한복음은 요한공동체에게 신앙의 자양분을 공급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요한공동체는 신앙을 지 탱할 자양분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공동체인 그들에게 거의 2대가 가까운 세 월 동안 기다리던 예수님의 재림(퍼루시아, Parousia)은 오지 않았고, 그들의 예배공간인 유대교 회 당으로부터도 쫒겨날 처지에 있었으며, 사회, 경제, 종교적 위험에 처하는 등 즉각적인 박해의 위험이 있어 예수님을 믿고 나가기에는 무척 힘든 처지에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고별사를 통하여 공동 체 사람들이 세상의 악으로부터 보호되고 그들의 신앙이 자라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며, 이들에게 예수 님의 신의를 확인시키고 희망을 주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To summarize: this Gospel encourages us to live in a loving relationship with God and other neighbours. When we become one with God and among ourselves, we will live eternal life. But in this Gospel, it holds a very specific and unique view: it claims that Eternal life is not something we experience when we die.. This Gospel offers a different perspective on eternal life like it offers us a pair of sunglasses with a different coloured lens. Here in today’s Scripture reading, Eternal life is in present tense; it is a lived reality when we believe in and have faith in God in Jesus. When we see and hear and witness God’s presence in our lives and our community, we’ve already experienced God and we live in eternal life.

 

지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복음은 우리가 하나님과 우리의 이웃들과 더불어 좋은 관계 속에서 살 것을 권장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는 영생을 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복음서는 매우 구체적이고 독특한 시각을 드러냅니다. 즉, 이 복음서는 마치 우리에게 다른 색의 렌즈를 가진 선글라스를 권하듯, 우리에게 다른 시각에서 영생을 보기를 권합니다. 오늘 본 본문에서 영생은 현재 형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예수 안의 하나님을 믿을 때 그것은 곧 경험된 현실이 됩니다. 우리가 우 리의 삶과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보고 듣고 증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이미 경험했고 따라 서 영생 안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Through new perspectives and interpretations on what had happened and what would come to their community, the Gospel of John draws a bold conclusion: that eternal life is ours now as we live a new kind of life as a result of faith in Christ; we are born to a new life as a result of faith in Christ and we are resurrected. What about Paoursia? Jesus’ second coming? - Christ comes again when we believe in him. These are some radical and important aspects of the theology in this Gospel.

 

요한공동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고 앞으로 공동체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해석을 통해 요한복음은 다음과 같은 과감한 결론을 내립니다: 즉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결과로 우리 는 새로운 종류의 삶을 살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영생의 삶을 산다는 것.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결과, 새 삶으로 다시 태어났으므로 우리는 부활의 사람들이라는 것.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다 시 오시는 것이므로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것. 이런 내용들이 요한복음 신학에서 보이는 몇몇 과감하고 중요한 요소입니다.

 

Last week I mentioned my vision of Willingdon Heights United Church to be an Intercultural church. In here, ‘inter’ means ‘between, among or mutual’, and ‘intercultural’ suggests the space “in-between” cultures. It can contain the “Third Space” as a meeting zone in the middle among different cultures. In that space, different cultures can freely meet and interact without being reduced by a dominant culture.

지난 주, 저는 윌링던 하이츠 연합교회가 문화상호적 교회가 될 것이라는 저의 비전에 대해 말씀 드렸 습니다. 여기서 ‘inter'라는 접두어는 ‘둘 혹은 그 이상 사람들의 사이, 혹은 상호적인’이라는 뜻이 있습 니다. 그리고 ‘문화상호적’(intercultural) 이란 낱말은 ‘사이에 끼인’(in-between) 문화라는 뜻이 있 습니다. 그 말은 “제3의 공간”(Third Space)이란 뜻도 포함하는데, 서로 다른 문화들이 어느 한 지배 적인 문화로 인해 축소되는 일 없이 서로 자유롭게 만나고 교류하는 만남의 구역입니다.

 

In our Willingdon Heights United Church which is made up of diverse groups of people and we can create this exciting and adventurous third space if we have the will and God wills it. We can create a welcoming space giving and receiving hospitality and love. We have such diverse people and if we live in an intimate relationship with God and among ourselves, and trust each other to respect our own individuality, we can live eternal life - the life already experienced and realized!

 

다양한 그룹의 사람들로 구성된 윌링던 하이츠 연합교회 안에서 하나님이 원하시고 또 우리가 원한다 면, 이 제3의 공간을 신나고 모험해 볼 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이곳을 서로 사랑과 환대를 주 고 받으면서 환영하는 우호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 윌링던 하이츠 연합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지내고 또 우리 고 유의 개별성을 존중해 준다는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이미 체험되고 실현된 영생을 살 수 있을 것입 니다.

 

If we wear the sunglasses with the same lenses labelled as Intercultural ministry, and make our own sacred space called the “Third space”, where people are faithful, truthful, and loving, we can live our eternal life ‘here and now’. That won’t be too ambitious for us to dream because we trust that God will be with us in our mission. And we will not be alone. We will have our Helper, the Advocate, the Holy Spirit, that will guide us. And God will be with us, as he has been all along. Thanks be to God. Amen.

 

우리가 문화상호적 목회라는 꼬리표가 달린 같은 렌즈의 선글라스를 쓴다면, 그리고 제3의 공간이라 고 불리는 신성한 공간에서 신실하게 서로 사랑하며 산다면 우리는 우리의 영생을 ‘현재 이곳에서’ (here and now)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선교에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는다면 이는 우리가 꿈을 꾸기에 너무나도 거대한 야심이라고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우 리의 조력자, 보혜사, 성령님께서 우리를 안내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그래오셨듯, 하나님 이 우리와 동행할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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